it-moon 님의 블로그
30화 — 1위에서 지워진 사람 본문
새벽 세 시 십칠 분, 성수 사옥의 현황판 맨 위가 바뀌었다.
헤일로. 실시간 1위.
경보음처럼 짧은 축하음이 울렸다. 야근 중이던 직원들이 박수를 쳤다. 누군가는 휴대전화로 화면을 찍었고, 누군가는 단체 대화방에 금색 왕관을 올렸다. 문세아는 박수 대신 원자료 창을 한 칸 더 확대했다.
두 시 사십 분부터 세 시 십 분까지.
해외 계정 묶음의 재생 간격은 지나치게 일정했다. 사십이 초 재생, 이 초 정지, 다시 사십이 초. 서로 다른 국가로 표시된 계정 백여 개가 같은 초에 접속했고, 동일 계정 묶음에서 반복 구매로 추정되는 신호가 갈라져 들어왔다.
사람이 몰린 그래프가 아니었다. 기계가 사람 모양으로 줄을 선 그래프였다.
오전 네 시, 도현우 명의의 내부 분석이 전 직원에게 배포됐다.
조라희 관련 부정 반응 감소. 잔존 멤버 선호도 결집. 같은 시기 순위 상승과의 상관관계 확인.
세아는 첨부된 새벽 정산표를 열었다. 해외 자동 계정 구간은 ‘글로벌 팬덤 자연 유입’으로 합산돼 있었다. 붉은색으로 표시해 둔 이상치 그래프는 통째로 빠졌다. 표와 표 사이에 있어야 할 한 장이 없었다.
빈칸은 깨끗했다. 그래서 1위도 깨끗해 보였다.
세아는 출력물을 들고 백지안의 자리로 갔다. 지안의 모니터에도 1위 표시가 떠 있었다. 흰 바탕에 검은 숫자 하나. 지안은 그것을 오래 보고 있었다.
“라희 씨 분리와 순위 상승 사이에 기술적인 인과는 없습니다.”
세아가 두 보고서를 나란히 놓았다.
“분리 전후보다 새벽 비정상 유입의 영향이 큽니다. 제가 표시한 구간은 공식본에서 삭제됐고요.”
지안은 종이를 넘겼다. 손끝이 한 번 멈췄다.
“자동 계정이라고 확정할 수 있어요?”
“접속 간격과 구매 신호 묶음은 비정상입니다.”
“확정할 수 있냐고 물었어요.”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확정에는 플랫폼 원자료와 결제 대조 기록이 더 필요했다. 아직 없는 증거였다. 그렇다고 지금 있는 이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조작이 아니라는 증거도 없습니다.”
“그 상태에서 1위를 포기할 수는 없어요.”
지안은 삭제된 그래프 자리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원자료 기준으로 보고서를 다시 만드세요. 확인된 사실과 추정을 분리하고, 라희 관련 반응과 순위 상승을 연결한 문장은 빼요.”
“정산표의 1위는요?”
“유지합니다.”
세아가 지안을 바라봤다. 지안은 이번에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지안은 예전에도 비슷한 판단을 했다.
개인 권리보다 유통과 홍보 조건을 우선하면 팀 전체 성과가 커진다고 판단했고, 승인했다. 결과도 나왔다.
그 결과에 빠진 사람이 있었다.
지안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그러니까 더 정확해야 했다. 판단 자체가 틀렸던 게 아니라, 계산하지 못한 비용이 있었던 거니까.
지안은 그 생각이 설명인지 신념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다만 다시 현황판을 보는 순간은 분명했다.
1위라는 숫자가 변명이 아니라 증명인 것처럼 보였다.
오전 여덟 시 십이 분, 익명 계정에 문건 여섯 장이 올라왔다.
조라희 내부 유출 의심. 기기 제출 명령. 활동 분리 및 대기 발령.
그 아래에는 멤버별 비정상 재생 비율이 붙었다. 라희의 이름 옆 수치가 가장 크게 잘려 확대돼 있었다. 문건을 빼돌린 사람과 조작으로 이득을 본 사람이 하나의 얼굴로 합쳐졌다.
백지안은 게시 시각과 문건 작성 시각을 번갈아 봤다. 대기 발령 시각은 사내에서도 제한된 인원만 알았다. 어젯밤 이후의 자료까지 나갔다.
유출은 끝난 사건이 아니었다.
회의실 문이 닫히자 도현우가 화면을 껐다.
“개인 일탈로 정리합시다. 팀 활동은 강행하고.”
“유출 주체가 라희라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조사하겠다고 하면 돼요. 대신 헤일로와는 분리해야지. 대응안 가져와요. 오늘 안에.”
선택지들이 지안의 머릿속에서 갈라졌다. 분리 철회. 침묵. 활동 중단. 라희 분리 유지와 공식 제외 발표, 즉시 해명.
그녀가 마지막 안을 붙드는 순간, 세상이 멎었다.
회의실 유리벽과 도현우의 입술과 현황판의 상승 화살표가 정지했다. 눈앞에 여섯 달 뒤의 구독자 수가 겹쳤다. 여러 숫자가 위아래로 밀려났다. 가장 큰 수치가 마지막 선택지에 붙었다.
정지가 풀리자 왼쪽 관자놀이가 깨질 듯 울렸다.
지안은 책상 모서리를 짚었다. 이미 갚지 못한 잠 위에 다시 여덟 시간이 얹혔다. 최소 열여섯 시간. 눈을 감자 방금 본 선택지의 순서가 뒤집혔다. 가장 큰 숫자가 세 번째였는지 네 번째였는지, 끝자리 두 개가 같은 수였는지조차 흐려졌다.
“백 대리님.”
세아의 목소리가 가까웠다.
지안은 자신이 얼마나 오래 멈췄는지 알 수 없었다. 세아는 보고서가 아니라 그녀의 눈을 보고 있었다.
“방금 구독자 수, 사백이십팔만이었죠?”
질문이 입 밖으로 나온 뒤에야 지안은 잘못을 알았다. 세아에게 보여 준 적 없는 수치였다.
“어떤 수치요?”
“아니요.”
지안은 숨을 짧게 들이켰다.
“순서 확인한 겁니다.”
“제가 말씀드린 건 선택지별 수치가 아닙니다.”
편두통이 한 번 더 뛰었다. 지안은 기억을 붙잡는 대신 가장 선명하게 남은 크기만 택했다. 가장 높은 것. 그것이면 충분해야 했다.
“기존 분리는 유지합니다. 오늘 공식적으로 활동 제외를 발표하고 즉시 해명문 내세요.”
도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작 가담으로 적죠.”
“아니요. 조사 중이라고 씁니다. 가담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 한 문장을 낮춘 것으로 지안은 사람을 지켰다고 생각했다. 라희를 범인으로 확정하지 않았다. 팀의 수치도 지켰다. 둘 다 잃지 않는 안이었다.
다만 라희를 팀 밖에 세워 둔 선은 그대로였다.
낮 열두 시, 연희 연습동의 벽걸이 화면은 반으로 갈라져 있었다.
왼쪽에서는 헤일로의 첫 실시간 1위를 축하하는 영상이 반복됐다. 색종이가 터지고 멤버들의 과거 연습 장면이 빠르게 지나갔다. 오른쪽에서는 조라희 내부 유출 의혹이라는 속보 자막이 흘렀다.
축하 영상에는 라희의 얼굴이 있었다. 속보에도 있었다.
회사 직원은 남은 멤버들 앞에 확인문을 놓았다.
조라희와 분리 조치 이후 개인적으로 연락한 사실이 없음을 확인합니다.
강유림은 펜을 들지 않았다.
“서명해 주세요.”
“연락 여부를 왜 확인하죠?”
“불필요한 오해를 막기 위해서예요.”
“사실이 아니면요?”
직원의 입술이 굳었다. 다른 멤버들의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유림은 확인문을 밀어냈다.
라희의 두 번째 휴대전화는 연습동 밖으로 반출해 둔 상태였다. 그 안에는 압박 면담의 목소리와 인공지능 가이드 제작 과정이 녹음돼 있었다. 회사가 무엇을 요구했고, 누구의 원본을 어떤 방식으로 가져갔는지는 입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라희가 문건을 유출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아니었다. 비정상 재생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증거도 아니었다.
지금 공개하면 휴대전화가 어디서 나왔는지부터 추적될 것이다. 반출 경로가 드러나면 라희와 자신에게 압박이 집중된다. 유림은 침묵이 두려웠지만, 서두른 폭로가 곧 진실은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휴대전화는 아직 꺼내지 않는다.
대신 확인문에 서명하지 않는다.
그것이 지금 선택할 수 있는 선이었다.
지안이 연습실에 들어왔을 때 축하 영상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있었다. 실시간 1위. 커다란 숫자 아래 멤버들의 이름이 지나갔다. 라희의 이름만 없었다.
유림이 물었다.
“1위를 지키려면 이번에는 누구를 지울 거예요?”
지안의 걸음이 멈췄다.
“라희는 조사 중이야. 결과가 나오면 복귀시킬 수 있어.”
“그때도 이 1위는 남겠죠.”
유림은 화면을 가리켰다.
“회사는 벌써 라희 관련 반응과 순위 상승을 묶어 기록했어요. 성공 사례로 전 직원한테 보냈고요. 복귀시키면 그 기록도 지워져요?”
지안은 답하지 못했다.
숫자 하나가 화면 한가운데서 빛났다. 회귀 전에도 그녀는 팀 전체를 위해 승인란에 이름을 썼다. 유림이 직접 찾아와 자기 이름이 빠지는 계약에는 서명할 수 없다고 했고, 지안은 유통 조건과 홍보 물량과 성공 확률로 그 말을 반박했다.
곡은 성공했다.
그 뒤 유림은 혼자 권리 침해와 악성 여론을 견뎠다. 마지막 전화는 연쇄의 끝에 놓인 한 칸일 뿐이었다. 시작에는 지안의 서명이 있었다.
그래도 판단은 옳았다고 믿었다. 더 정확히 계산했다면 사람도 성과도 남길 수 있었다고.
그래서 이번 1위를 붙들었다.
지안은 축하 화면을 올려다봤다. 1위는 분명했다. 숫자는 틀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 숫자에서 지워진 사람이 누구인지는, 이제 너무 선명했다.
처음으로 1위가 자신의 정당성을 증명하지 못했다.
'창작 소설 > 차트 밖의 너' 카테고리의 다른 글
| 32화 — 증거를 쥔 사람 (0) | 2026.08.24 |
|---|---|
| 31화 — 예약된 가해자 (0) | 2026.08.24 |
| 29화 — 가장 좋은 침묵 (0) | 2026.08.24 |
| 28화 — 지워지지 않는 청구서 (0) | 2026.08.24 |
| 27화 — 같은 바닥값 (0) | 2026.0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