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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moon 님의 블로그
죽어가는 사람 보는 게 싫어서 속독했다이야기는 단순하다. 판사 이반 일리치가 커튼을 달다가 사다리에서 떨어져 옆구리를 부딪힌다.그 뒤로 통증이 안 사라지고, 병이 깊어지고, 몇 달에 걸쳐 죽는다. 그게 전부다.솔직히 속독했다. 죽어가는 사람을 계속 보는 게 싫어서 빨리 넘겼다.불쌍하긴 한데 죽는다는 사실이 불쌍한 게 아니었다. 죽어가는 과정 자체가 보기 힘들었다.그래서 이반이 죽었을 때 슬프지 않고 안도했다. 드디어 끝났네 싶었다.제일 무서운 건 계기였다. 커튼 달다 옆구리 한 번 부딪힌 걸로 사람이 이렇게 죽는다고?근데 실제로 그렇긴 하다. 사소한 걸로도 죽고, 저걸 어떻게 살아 싶은 일에서도 살아남는다.죽음으로 넘어가는 경계가 생각보다 허술하다. 그게 무섭다.아무도 나쁜 놈으로 안 뒀다이 소설은 주변..
규칙을 빼봤더니 안 무너졌다1편에서 곡 세 개를 뽑았고 전부 1회 생성에서 나왔다. 실패가 없었다. 그런데 거기서 질문이 걸렸다."이제 Suno가 좋은 건지 이게 좋은 건지 모르겠어."내가 만든 곡은 전부 내 문서로 만든 것이었다. 그러면 Suno가 원래 잘 뽑는다와 내 방법이 먹힌다가 똑같이 잘 들어맞는다. 관측이 전부 "잘 나옴"이라 아무것도 못 가린다. 천장에 붙어 있으면 어떤 요인도 차이를 못 만든다.그래서 반대로 갔다. 바닥을 만들기로 했다. 규칙을 하나씩 부숴서 무엇이 무너지는지 보는 것이다. 네 단계를 돌렸고, 결과만 적으면 이렇다.규칙을 아예 빼고 GPT에 주제만 던졌더니 좋았다. 그리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내 규칙 상당수를 이미 지키고 있었다 — 숫자를 한글로 풀고, 태그 문법을 맞추고, ..
짜증에서 시작했다요즘 음악 플랫폼에 AI로 뽑은 곡이 판친다. 듣다 보면 짜증이 난다. 그런데 그 짜증을 좀 뜯어보니 안쪽에 다른 문장이 하나 있었다. "그러면 나도 하면 되는 거 아닌가."정확히 말하면 음악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니다. 나는 악기를 다룰 줄 모르고 화성학도 모른다. 내가 붙잡은 건 이거였다. 가사만 잘 쓰면 되는 것 같은데. 즉 음악 프로젝트가 아니라 글쓰기 프로젝트로 보였다.시작하기 전에 조건을 하나 걸었다. 1곡, 2시간, 그 주 안에. 그리고 이 조건이 진짜다.실패해도 글로 회수한다. 단, 실패가 글이 되려면 기록된 실패여야 한다.Suno 몇 번 눌러보다 흐지부지되면 곡도 안 남고 글감도 안 남는다. 그러면 그냥 시간만 버린 게 된다. 그래서 프롬프트·실패·수정 과정을 전부 파일로 ..
석가모니인 줄 알고 읽었다처음엔 이게 석가모니 전기인 줄 알았다.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지 않나. 그래서 언제 보리수로 가나, 언제 가나 하면서 읽었는데 끝까지 안 가더라. 알고 보니 소설이었다.헷갈릴 만한 이유는 있다. 부처의 본명이 싯다르타 고타마다. 싯다르타는 이름이고, 고타마는 씨족 이름이다. 석가모니는 '샤카족의 성자'라는 호칭이고, 부처는 '깨달은 자'라는 칭호다. 전부 같은 사람을 부르는 말이다.그런데 헤세는 그 이름을 둘로 쪼개서 서로 다른 두 인물에게 나눠줬다. 역사 속의 부처는 소설에서 고타마라는 이름으로 나오고, 주인공에게는 싯다르타만 준다.그리고 소설 초반부에서 둘을 만나게 한다. 이름으로 보면 한 사람의 두 조각이 마주 앉은 셈이다. 싯다르타는 고타마가 진짜로 깨달..
붉은 표시등이 켜지기 사십칠 초 전.송출까지 남은 시간, 사십칠 초.청파 라이브홀 조정실 앞 모니터 두 대에 서로 다른 문장이 떠 있었다. 왼쪽은 방송사 본편이었다. 헤일로 전원 출연. 사전에 제출한 진행 순서와 멤버 이름뿐이었다.오른쪽은 오로라가 운영하는 온라인 동시 송출 화면이었다.조라희의 개인적 일탈에 관한 입장.강유림의 자발적 협업 과정에 관한 설명.현장 총괄 연출이 무전기를 내렸다.“본편 자막은 못 바꿉니다. 주조정실 확정 사항이에요. 오로라 교체안은 보류하겠습니다.”도현우는 대답 대신 온라인 송출 담당자를 보았다.“그쪽 화면은 우리가 운영하지.”담당자의 손이 자판 위에서 굳었다.“별도 자막 대기시켜. 방송 본편과 겹치지 않게 하단으로.”“대표님, 문구가 아직—”“법무 검토 끝났어.”끝난 것은 ..
생방송까지 삼십오 분.대기실 탁자 위에 최종 해명문과 출연 동의서가 놓였다. 종이는 아직 따뜻했다.백지안은 첫 문장부터 읽었다.조라희가 회사의 관리 지침을 위반하고 개인 휴대전화를 사용했다. 녹음은 회사와 무관한 개인적 일탈이었다. 강유림은 자신의 원본 음원을 신기술 기반 가이드 제작에 자발적으로 제공했다.자발적.유림이 제공한 것은 원본이었다. 동의한 것은 검토였다. 학습과 변형, 권리 이전까지 허락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해명문은 빠진 동의를 결과 뒤에 갖다 붙였다.법무팀 직원이 마지막 조항을 짚었다.“두 사람 서명이 없으면 전원 출연 취소입니다. 손해배상도 검토하고요.”유림의 손가락이 종이 모서리를 눌렀다. 라희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도현우가 맞은편에 앉았다.“개인 둘의 책임을 제한적으로 인정하는 ..
최종 리허설까지 사십이 분.백지안은 방송사 조연출이 내민 큐시트를 훑었다. 종이는 한 장이었고, 바뀐 줄은 두 개였다.강유림의 직접 발언은 엔딩 무대 뒤로 밀려 있었다. 조라희의 증거 공개 순서는 사라졌다.“편성상 조정이랍니다.”오로라 무대운영팀장이 말했다. 지안은 마지막 칸을 손가락으로 짚었다.변경본 승인자. 공란이었다.“누가 조정했습니까?”“방송사랑 협의된 걸로 들었습니다.”“협의한 사람 이름을 묻는 겁니다.”팀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대에서는 조명 열두 대가 켜졌다. 흰빛 아래 먼지가 떠올랐다. 객석 전광판에는 헤일로의 사전 화제량이 분 단위로 갱신되고 있었다.지안은 큐시트를 접지 않았다.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무대 바닥에는 검은 테이프가 세 겹으로 붙어 있었다. 서태준은 그 선을 따라 걸으며 멤버..
도현우가 내민 것은 합의서가 아니었다.다섯 개의 봉투였다.“공동 조건서는 받을 수 없습니다.”오로라엔터테인먼트 성수 사옥의 유리벽 너머로 오전 매출 현황판이 흘렀다. 초 단위로 바뀌는 숫자 아래, 흰 봉투 다섯 개는 움직이지 않았다.“대신 각자 필요한 걸 주죠.”유림의 봉투에는 단독 무대와 자작곡 크레딧 복구가 적혀 있었다. 라희에게는 센터 유지. 나머지 멤버들에게는 차기 활동 보장. 보상의 이름은 달랐지만 서명란 위 문장은 같았다.개별 출연에 동의하며 협의 내용을 제삼자에게 공개하지 않는다.“서로 어떤 제안을 받았는지 알 수 없게 하셨네요.”지안이 묻자 도현우는 부정하지 않았다.“개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겁니다.”한 명이면 됐다. 한 명이 서명하면 공동 조건은 다섯 사람의 요구가 아니라, 출연을 원하는 ..
망원 합숙집 식탁 위에 네 줄이 적혀 있었다.발언 순서 보장. 사전 해명문 강요 금지. 마이크 차단 시 외부 기록 공개. 다른 멤버의 책임을 대신 인정하지 않을 것.생방송까지 사흘.유림은 종이를 멤버들 쪽으로 밀었다. 식탁 아래에는 휴대전화가 놓여 있었다. 현관과 거실을 보는 회사 카메라의 사각이었다.“이 네 가지가 받아들여져야 나갈 거야.”누구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냉장고가 돌아가는 소리가 침묵을 채웠다. 지안은 멤버들의 얼굴 대신 종이를 봤다. 조건은 수치가 아니었다. 받아들였을 때의 예상 조회수도, 거절했을 때의 손실액도 적혀 있지 않았다.라희가 네 번째 줄에 손가락을 올렸다.“제가 먼저 말하면 안 돼요.”“센터니까 먼저 시키려고 할 텐데.”“그래서요.”라희의 목소리는 촬영할 때처럼 반듯했다.“..
도현우가 띄운 일정표에는 두 개의 붉은 선이 같은 시각에 닿아 있었다.상장 발표. 헤일로 생방송.“따로 움직이면 의혹이 이틀 갑니다. 한 번에 끝내죠.”첫 번째 안은 전원 출연이었다. 회사가 작성한 해명문을 멤버들이 차례로 낭독한다. 두 번째는 라희를 제외하고 유림은 침묵시키는 안. 세 번째는 라희를 제외한 뒤, 유림을 단독 활동으로 전환하는 안이었다.사람의 이름 옆에 예상 손실률이 붙었다. 라희의 이름은 세 안 중 두 곳에서 회색이었다.“활동 계약상 출연 요구는 가능합니다.”도현우의 말에 법무팀장이 입술을 눌렀다.“그 조항을 아직 이 회의에 제출하지 않으셨습니다. 출연 의무가 있다고 해도 발언 내용까지 지정할 수 있는지는 내부 의견이 갈립니다.”“그러니까 검토하라는 겁니다. 방송 전까지.”벽면 시계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