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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 가장 좋은 침묵 본문
보안팀이 띄운 화면에는 두 줄뿐이었다.
최초 인증 계정, 조라희.
동일 시간대 외부 접속, 홍보 외주사.
두 줄 사이를 연결하는 화살표는 붉었다. 실제로 파일이 반출됐다는 증거는 없었다. 전송 기록도, 일치하는 파일도 없었다. 그런데 화살표 하나가 원인과 결과를 이미 완성해 놓고 있었다.
“미등록 기기의 최초 인증자가 조라희 연습생입니다.”
보안팀장이 결론부터 말했다.
“내부 자료 유출자로 추정됩니다.”
세아가 손을 들었다.
“인증자는 기기를 망에 붙인 계정일 뿐이에요. 실제 사용자가 같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외주사 직원들도 해당 층 무선망을 쓴 기록이 있고요.”
“그래서 조사하자는 겁니다.”
도현우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일정표 위로 붉은 막대가 빽빽했다. 사흘 뒤 촬영, 닷새 뒤 사전 녹화, 그다음 주 팬 행사.
“데뷔조 전원을 세우면 이게 전부 밀립니다. 라희에게 기기 제출을 요구하고 대기시키죠.”
“반출 여부조차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확인하는 동안 일정이 기다려 줍니까?”
지안은 네 개의 조치안을 화면에 나란히 놓았다.
라희를 활동에 남긴 채 전원 내부 조사.
헤일로 활동 전체 중단과 외부 감사.
라희에게 기기 제출을 요구하고 단독 촬영에서만 분리하되 팀 활동 유지.
라희의 모든 활동 중단과 징계 개시.
어느 안도 무고한 사람을 보호한다는 문장으로 시작하지 않았다. 일정 손실, 광고 위약금, 유료 구독 이탈률. 회사가 읽을 수 있는 항목만 붙어 있었다.
지안이 세 번째 안을 응시했다.
시야가 멎었다.
회의실의 냉방기 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네 선택지 위로 3개월 뒤의 숫자가 겹쳤다. 유료 구독자 수. 첫 번째보다 세 번째가 높았다. 두 번째는 급락했고, 네 번째는 그보다 조금 나았지만 회복되지 않았다.
가장 높은 숫자는 라희에게 기기 제출을 요구하고 혼자 떼어 놓은 채 헤일로를 계속 움직이는 안에 붙어 있었다.
지안의 손이 허공에서 1초 넘게 멈췄다.
“백 대리님?”
초점이 돌아왔을 때 세아가 지안을 보고 있었다. 관자놀이 안쪽에서 둔한 박동이 시작됐다. 최소 8시간. 오늘 새로 갚아야 할 수면이었다.
숫자는 결과만 보여 줬다. 라희가 실제 유출자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구독자들이 음악 때문에 남는지, 한 사람을 의심하며 결속하는지도 말하지 않았다.
회귀 전에도 높은 수치는 한 사람을 비용으로 바꿔 놓았다.
그래도 일정은 유지해야 했다.
조작분을 걷어 내고도 헤일로가 성공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려면, 먼저 성공이 계속되어야 했다. 지난 판단이 틀린 게 아니라 계산에 빠진 항목이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그 항목까지 통제하면 됐다.
지안이 승인란을 열었다.
“라희 씨에게 개인 기기 제출을 요구하고 단독 촬영은 보류합니다. 팀 일정은 유지하죠.”
세아의 입술이 굳었다.
“이 기록만으로요?”
“징계 확정이 아니라는 문구를 넣겠습니다. 조사 중 임시 분리라고 명시하고요.”
지안은 문장을 직접 덧붙였다.
그 문구가 라희를 지켜 줄지, 회사만 지켜 줄지는 숫자에 나오지 않았다.
불시 소지품 검사는 오후 훈련이 끝나기 12분 전에 통보됐다.
라희는 거울 앞에서 땀을 닦다가 유림의 손바닥에 휴대전화를 눌러 놓았다. 회사에 등록한 것과 다른 기기였다. 검은 화면에는 둘의 얼굴이 희미하게 겹쳤다.
“이 안에 면담 녹음 있어.”
라희가 낮게 말했다.
“가이드 만든 화면도. 원본 남아 있어.”
“왜 나한테 줘?”
“지금은 네가 덜 의심받으니까.”
말은 부탁이 아니라 조건처럼 잘려 있었다. 라희는 곧바로 돌아섰다.
유림은 휴대전화를 연습실 안쪽에 놓인 후드 주머니에 넣었다. 차갑고 납작한 무게가 천을 늘어뜨렸다.
비상계단에는 자신의 저장장치가 있었다. 처음 곡을 만든 날짜와 수정 시각, 가사 초안이 모두 담긴 원본. 회사 서버에 올리지 않은 유일한 자료였다.
둘 다 이 건물 안에 있었다.
복도에서 보안팀 직원이 외쳤다.
“검사 범위 확대합니다. 개인 소지품, 사물함, 비상계단 공용 공간까지 전부 확인하겠습니다.”
연습동 접속 기록이 발견됐다는 말이 뒤따랐다. 통제선이 출입문 앞에서 계단 쪽으로 늘어났다.
태준은 검은 장비 가방을 들고 선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공연 장비는 사전 반출 승인을 받아 검사 대상에서 빠졌다. 직원이 명단과 가방 표찰을 대조했다.
“서태준 디렉터님, 확인됐습니다. 나가셔도 됩니다.”
몇 초.
유림은 연습실 안쪽에 놓인 라희의 휴대전화와 계단 두 층 아래 숨겨 둔 저장장치 사이를 보았다. 양쪽을 다녀올 시간은 없었다. 한쪽으로 뛰면 다른 쪽은 수색망에 걸린다.
자신의 곡을 먼저 꺼내야 했다.
그 원본이 없으면 최초 생성 시점을 입증하기 어려워진다. 다시 한 번 자신의 권리를 나중으로 미루는 일이었다. 나중이라는 말이 결국 누구의 이름을 지웠는지 유림은 아직 알지 못했지만, 목구멍이 먼저 조여 왔다.
후드 주머니 속 기기가 진동했다. 전원이 꺼지지 않은 짧은 떨림이었다.
압박 면담에서 누가 무엇을 시켰는지, 인공지능 가이드가 무엇을 먹고 만들어졌는지. 이걸 빼앗기면 라희에게 남는 건 최초 인증자라는 한 줄뿐이었다.
유림은 몸을 돌렸다.
유림은 휴대전화를 꺼내 태준의 장비 가방이 벌어진 틈으로 밀어 넣었다. 케이블 뭉치 아래로 검은 모서리가 사라졌다.
태준의 시선은 통제선 앞 직원에게 향해 있었다.
유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직원이 통제선을 접으려 다가왔다. 태준은 가방 안을 보지 않은 채 지퍼를 닫고 가방을 들어 선 밖으로 걸었다.
유림은 비상계단으로 달렸다. 문을 여는 순간 흰 장갑을 낀 직원이 난간 아래에서 투명 봉투를 들어 올렸다.
그 안에 은색 저장장치가 있었다.
“소유자 확인하겠습니다.”
유림의 발이 문턱에서 멎었다.
“제 겁니다.”
“조사 종료 후 반환 절차 안내드리겠습니다. 그전까지 봉인 보관됩니다.”
직원은 봉인띠에 시간을 적었다. 오후 4시 38분. 유림의 곡이 자신의 손을 떠난 시각이 숫자로 남았다. 누가 열람하고 무엇을 복사할 수 있는지는 적히지 않았다.
연습실로 돌아오자 라희가 빈손을 먼저 봤다.
“내 건?”
“나갔어. 태준 선생님 가방에.”
“네 저장장치는?”
유림은 대답하지 않았다. 라희의 시선이 비상계단 쪽으로 옮겨 갔다가 돌아왔다.
잠깐, 라희의 얼굴에서 카메라 앞에 쓰던 표정이 사라졌다. 고맙다는 말이 입술 끝까지 올라온 듯했다. 그러나 라희는 턱을 굳혔다. 감사를 말하는 순간 이것이 거래가 되고, 언젠가 갚아야 할 빚이 될 것 같았다.
유림도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는 지켜 낸 기기 하나가 있었지만, 그 사실을 증명할 말은 없었다.
저녁 보고서에서 두 사람의 물건은 하나의 경로가 되어 있었다.
라희 계정으로 인증된 미등록 기기.
유림 소유의 외부 저장장치.
같은 연습동에서 수색 대상이 됐다는 이유로 두 항목 사이에 또 붉은 화살표가 그어졌다.
세아가 표를 확대했다.
“저장장치 접속 이력이 없습니다. 유출 파일과 해시가 일치하는지도 확인 안 됐고, 복사 시각도 없어요. 소유자와 전송 주체가 다를 수 있습니다.”
“둘 다 같은 장소에서 나왔잖습니까.”
도현우가 말했다.
“하나는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문제의 기기는 확보하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기존 조치를 유지하는 겁니다. 조사 끝날 때까지 라희 단독 촬영 중단. 헤일로 활동은 진행.”
지안은 보고서의 제목을 수정했다.
‘조라희 유출 건’이 ‘미등록 기기 경유 가능성 조사’로 바뀌었다.
세아가 물었다.
“표현만 낮추면 분리는 그대로 해도 됩니까?”
지안은 답하지 않았다.
회귀 전, 유림은 계약서를 들고 직접 찾아왔었다. 자기 이름이 빠지는 양도안에는 서명할 수 없다고 했다. 지안은 유통 조건과 홍보 물량, 신인 단독 크레딧의 협상 위험을 숫자로 반박했다. 그리고 마지막 승인란에 자기 이름을 썼다.
그 곡은 데뷔곡이 됐다.
유림은 권리 침해와 악성 여론을 혼자 받았다. 마지막 전화는 그 뒤에 왔다. 받지 않은 전화는 시작이 아니었다. 지안이 이미 완성해 둔 연쇄의 마지막 한 칸이었다.
지안은 수정된 보고서를 저장했다.
이번에는 피해자를 바꾸는 게 아니었다. 성공 과정의 오류를 줄이는 일이었다. 징계를 확정하지 않았고, 팀 활동도 지켰다. 이전보다 정확한 선택이었다.
그때 회의실 벽의 실시간 현황판이 갱신됐다.
헤일로, 실시간 2위.
1위와의 격차가 줄어드는 숫자가 초 단위로 표시됐다. 아침에 배포된 새벽 정산표가 그 옆에서 푸른빛을 냈다.
“분리하고 바로 반응 오네요.”
누군가 말했다.
“잡음 차단한 효과 아닙니까?”
라희의 분리 사실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순위 상승과 연결될 경로는 없었다. 그래도 같은 날 일어난 두 사건은 사내에서 원인과 결과가 됐다. 방금 전까지 임시 조치였던 결정이 성과로 굳어졌다.
도현우가 현황판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안도 숫자를 보았다.
2위.
격차 축소.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는 증거처럼 정확했다.
다만 그 숫자가 누구의 침묵을 비용으로 삼았는지는, 어디에도 표시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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